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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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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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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회 그리고 남겨진 뒷이야기 1

  • 작성일 2019-02-04 오전 4:36:00 |
  • 조회 8
                           그리고 남겨진 뒷이야기.


임진왜란이 이렇게 완전히 막을 내린 후, 그 뒤에 남겨진 여러 이야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시대 오백 년 동안의 최고이자 가장 큰 참상의 상황~ 하물며 그 후의 에피소드인들 별로 개운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측의 피해는 엄청났다. 조선의 농토는 5분지 1수준으로 대폭 줄어들었고, 인구도 전쟁 전 830만의 거의 절반인 460만 정도로 줄었다.

완전히 나라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으며, 屍山血海의 폐허 속에 남은 거라고는 오직 빈 껍질만 남은 나라의 몰골이었다.

전쟁 중 도망치기만 바빴던(실은 도망이라기보단 작전상 후퇴에 가까웠고 이로 인해 결국 이겼지만) 조정은 백성들에게 이전과 같은 권위 및 특권을 요구하질 못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벼슬아치들의 체면은 무척 졸아들게 되었다.

더구나, 별로 잘나지도 못한 주제에 핏줄만 잘 타고나 잘 사는 기득권 특권층들… 즉 이 당시 조선시대엔 [양반]들은 심각한 갈등과 창피를 당하고 위신과 권위가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다.

상민들도 잘 않는 왜군들에 대한 항복이나 투항 등을 앞다퉈 한 양반놈들이 의외로 정말 많았고, 또한 전쟁시에 나가 싸운 자도 별로 없는데다(의병장들만 제외) 여자들은 왜병들에게 몸을 바치고 목숨을 보전한 못난 양반들이 절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저런 못난 양반들에게 존경심과 경외감을 잃어버리게 된 백성들은 양반들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차이인 반차] 라는 것에 대해 심한 모멸심을 갖고 되었고 곧 그를 아주 우습게 아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급격히 양반과 상민의 신분차이가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은 심한 신분제의 변화를 겪게 되고 머잖아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영원히 계속되는 신분제 사회’ 는 사실상 종말을 맞게 된다. 노비로 태어나도 공을 세우거나 벼슬 및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되는 자들이 엄청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양반이 별로 잘나지도 못한 사람들이고, 또 그런 신분쯤 극복할 수 있다는 공감대 정신이 일반 백성들 머릿속에 크게 뿌리박혀 그것을 실천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포로들 대부분은, 놀랍게도 다시는 조선 땅에 돌아가길 원하지 않았다.

이미 돌아간 별로 많지 않은 조선포로들이 결코 좋은 대접을 받질 못하고, 여기서 왜인들에게 받는 차별과 멸시보다 더한 고통을 받으면서 산다는 정보를 입수한 때문이었다.

일본에 잡혀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가보니 글쎄, 고향의 조선인들이 마치 자신들을 일본인이라도 된 듯이 타박하고 괴롭혀댄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민도가 낮은 불특정다수 백성들이 흔히 그렇듯, 자신들은 일본에서 고생하다가 살아왔더니 남자에겐 배신자라고 여자에겐 왜인에게 몸을 팔고 살아남은 추접한 자라고 아예 까놓고 외지인 취급을 해대니 도저히 조선에선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 : 놀랍게도??~ 적잖은 조선포로 귀환민들이 이래놔서 다시 일본으로 재귀환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결코 포로로 되어 있던 상황을 관대하거나 올바로 보지 않는 비뚤어진 민족주의와 저희끼리만 사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조선인들에게 한번 왜국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왜국사람보다도 더 나쁜 사람이라고 우기는 공감대가 강해서 거기에선 도저히 이들 귀환민들이 살 곳이 안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여기에서 일본 배우자들과 결혼해서 이미 아이까지 몇이나 있는 마당에 이미 없어졌을 조선의 가정을 위해 여기 일본에서 새로 만든 가정을 파탄시키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잖은가??

임진왜란 이후, 사명대사가 데리고 간 몇 건의 수백 수천 명 단위의 포로들을 제외한 나머지 조선포로들은 어쨌든 두 번 다시는 조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살기가 일본이 훨씬 편하고 대우도 받는 마당에 하긴 굳이 돌아갈 맘도 들지 않았겠지만…

간양록의 저자 강항 정도만이 고향에 돌아간 자발적인 조선인이었다. 하긴 명문양반인 그는 조선에 처자식 뿐 아니라 워낙 물질적으로도 두고 온 게 많아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실제로… 나중에 조사해보니?? 임란 당시에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의 귀환사례는 총 63건에다 63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최대로 많은 포로송환은 1606년 조선통신사 여우길 일행이 일본 조정에 가서 협의해서 데리고 온 1391명이 최대였다. 20만에 달하는 포로 중에 이 정도밖에 돌아오지 못하다니 참 엽기적인 일이다. 그 중 벌써 절반이 죽거나 서양에 팔려갔대도 십만은 족히 남았을 터인데도…

왜 이랬을까?~ 물론 그것은 돌아갈 배편이 없다거나 아니면 못 가게 잡아서 그렇다는 물리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은 [돌아가봐야 더 살기 힘들기 때문] 이었다.
바로 위에 나오는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걸 무슨 나라를 배신한 것으로 여기는 몰지각한 조선인들의 공감대와 집단 괴롭힘 때문’ 이었다.

더구나 일본 정부는 도공이나 종이 만드는 기술자 등의 특수기술자들은 한국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최고의 귀족 대우를 해주었기에, 돌아갈 생각이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면 자신은 천민 신세가 다시 될게 뻔한 판에 누가 돌아간단 말인가?? 돌아가지 않은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조선인들도 많이 일본으로 잡혀가 거기서 왜인으로 귀화해 평생 산 사람들도 많았지만 여기 와서 조선군에 잡힌 항왜들은 사실상 거의 일본으로 살아 돌아간 자가 전무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군대에 편입되어 조총을 쏘거나 만드는 야장으로 일생을 관노 야장이 되어 고달픈 일생을 마쳤다.

“나, 조선 사람 됐어이 해. 장가도 갔어 해.”
“나도 닛폰노 히또였지. 보쿠도 조선노 온나 색시 얻었스무니다.”

참전한 명나라나 일본 병사들 중엔 잡혀 포로가 되진 않았지만, 고향나라에 돌아가지 않고서 그대로 여기 눌러앉아 조선인으로 귀화한 사람들도 제법 많아서 이들을 모두 합하면 오십만에 육박할 정도로 많았다 한다.

당시 명이나 일본도 내전 중이었으므로, 어차피 고향에 돌아가도 살기 어렵긴 마찬가지기에 여기 눌러앉는 편이 훨씬 살기가 편한 조총이나 대포 기술자들 대부분은 조선에 귀화해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도요도미가 자신이 죽으면 조선의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라고 한 것도, 따지고 보면 단순히 자기 아들을 지킬 병력확보라기보단 내전이 금방 날 것이 뻔하여 본국의 치안을 담당할 병력이 조선정벌(어차피 이땐 물 건너간 상황이지만)보다 더 중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잖은 일본군 병사들이 돌아가지 못하거나 아예 자의로 돌아가질 않고 그대로 눌러앉았다. 특히 조총병들은 신기술을 우대하는 조선정부의 정책에 따라 여기 사는 게 더 편하다고 여겨 대부분이 김충선(사야가)처럼 국적을 옮겨 조선인이 되고 말았다.

조선 조정에선 그렇잖아도 전쟁 중에 남성 인구가 대폭 줄어 국가적 문제로 대두될 정도였으므로 이들의 귀화와 조선에 뿌리내림을 최소한 묵인했고, 이들을 조선백성들로 받아들여 새로운 호적을 만들어주었다.

임진왜란은 또한 이처럼 [이 조선민족과 일본이나 중국 민족등 타민족과의 피를 제일 많이 섞게 해준 전쟁]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은 한일중 모두에게였다.

중국으로도 요동으로 많은 조선백성들이 전란 중 몰래 건너가 중국인들과 피를 섞었으며 여기 온 왜군병사들 십중 팔구는 돌아가질 못했으므로 이들도 조선인들로 귀화해 현지에 눌러앉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물론 일본으론 많은 조선 백성들이 잡혀가 왜인들과 혼인해 돌아오질 못하게 되었으므로…


(주 : 이처럼 현재 이 나라 한국이 단일민족이란 건, 민족 핑계를 내세워 당신들 우매한 국민들을 이용하려는 정치꾼들의 새빨간 거짓말 핑계에 불과하다. 이처럼 4백년도 더 임진란 때부터 엄청난 이민족과의 유전자 교합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진씨나 조씨 채씨 왕씨 등 중국 성씨가 이 나라에 적잖게 섞인 건, 거의 전부가 이때 조선에 건너와 귀화한 명나라 병사들 때문이다. 물론 성씨야 한국식으로 바꿨겠지만, 이때 한국에 와서 한국여자와 결혼해 여기 남은 일본병사들도 수십만에 달할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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